개발자 인생 시작의 이야기

2011-02-06

연휴의 마지막 날이다. 항시 이런 연휴의 마지막 날이면 기분이 좋지 않다. 단순한 연휴 피로는 아니다. 보통 연휴라고 해도 무리 않고 많은 휴식을 취하니까.

아마도 다음 날 출근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30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젊은 시절의 열정이란 것을 모두 불 태워버렸기에 월요일 출근이 설레이는 기분을 느끼기란 쉽지 않을 듯 하다.

옛 추억에 매달리는 것은 집착일듯 싶다. 그래도 이제는 왕년을 추억하면 어깨에 힘 한 번 주지 않으면 너무 살기 어려워지는 나이가 된 듯 하다.

이런 마음을 좀 달래이고 싶어 어릴 적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개발자의 인생을 시작하게 만들었던 그 때의 이야기말이다.

어린 시절 옆 집은 쌀가게와 방아간을 했었다. 그 때 당시에 으레 그렇듯이 쌀가게를 하는 집은 돈 푼 좀 있는 집안이었고, 그게 걸맞게 애플 II 복제품이 있었다. 당시 컴퓨터는 정말 귀한 물건이었다. 난 그게 무엇을 하는 기계인지도 잘 몰랐지만 오락실처럼 게임이 실행되는 모습에 한 눈에 반할 수 밖에 없었다. 동전을 넣을 필요가 없는 게임기 정도로 생각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눈으로만 볼 수 있었을 뿐 게임 한 번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컴퓨터라는 것을 처음 보고도 그게 뭔지도 잘 모른체 컴퓨터와의 첫 짧은 만남은 끝났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초등학교라 불리는 국민학교 4학년 무렵 로봇 전시회에 가게 되었다. 어린 남자 아이치고 로봇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 경우는 드물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과학에 흥미가 많았기에 로봇 전시회에서 매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FC-30이라는 컴퓨터를 만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많고 나 외에 컴퓨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두 번째의 컴퓨터와의 만남도 눈길을 건네는 것으로 그칠 수 밖에 없었다.

로봇 전시회장을 떠나면서 얇은 책자를 하나 사 올 수 있었는데, 이 책의 끝부분에 로봇을 만다는 방법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있었다. 그 짧은 글을 통해 로봇을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생각을 동네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다들 믿지 않았다. 그래서 분한 마음에 로봇을 만들겠다고 친구들에게 선언을 하고 만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로봇을 만들기 위한 공부와 도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책에서 나온대로 하드웨어를 먼저 시작했다. 인두를 사고, 전자공학 서적을 사서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민학교 5 학년이 무슨 기초 지식이 있어 전자공학을 이해한다는 말인가? 처음에는 저항띠 읽는 것도 힘들었고, 트랜지스터의 개념도 이해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중학교 1 학년이 되어서야 약간 지식이 생기고 키트에 나온 회로의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 할 수 있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그 때 교실에서 007 키트책을 보고 있었는데 누군가 나와 같은 책을 보는 녀석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같은 취미를 계기로 녀석과 친해지게 된다. 물론 그 녀석과는 아직도 제일 친한 친구로 남아있다.

당시 광운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한 담장 안에 광운 전자 공업 고등학교도 같이 있었다. 광운 전자 공업 고등학교는 실습 때 많은 전자 회로를 만들기 때문에 학교 앞에는 너댓군데의 전자 부품 상점이 있었다. 세운상가만큼 많은 부품은 아니었지만 전자회로를 취미하는 사람에게는 꿈과 같은 장소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이런 곳이 없어 좀 아쉽다. 꼭 용산까지 가야만 하니 말이다.

암튼 그런 연유로 친구와 나는 중학생이라는 신분으로 고등학교 형들이 바글거리는 전자 부품 상점을 매일 같이 들락거리게 된다. 광운 전자 공업 고등학교에서 컴퓨터를 가르치는 과목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상점들 중에 애플 II+ 컴퓨터를 가져다 놓은 곳도 있었다. 이 컴퓨터는 복사 디스켓 판매를 할 때 빼고는 자유롭게 사용이 가능했다. 하지만 대부분 누군가는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학생이었던 나는 침만 삼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늦은 오후에 친구와 한 가게에 들렸는데 주인 아저씨 빼고는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컴퓨터 옆에는 베이직 책도 하나 놓여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베이직 책을 들고 친구와 함께 화면에 선을 그리는 코드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지금 같으면 1-2분이면 입력 할 수 있는 코드였지만 자판을 모르던 우리 둘은 퍼즐을 풀듯이 한글자 한글자 자판에서 찾아서 입력을 해야했다.

그 때 입력했던 프로그램은 화면에 선으로 L 자 형태의 로그 그래프 비슷한 것을 그리는 것과 모아레를 그리는 것이 두개였다. 시간을 가는 줄도 모르고 두개의 코드를 입력하고 나니 이미 저녁 시간이 훌쩍 넘어 9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부지런히 집에 들어갔지만 엄청나게 혼난 것은 당연지사.

이게 계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집 보다 비교적 살림이 나았던 친구는 부모님이 컴퓨터를 하나 장만해주었다. 역시 애플 II+ 복제품이다.

소풍을 가던 날 친구집에 들렸는데 아직 준비가 덜 된 친구를 기다릴 동안 책에 나온 코드를 입력했다. FOR 문을 이용해서 저해상도 그래픽 화면에 가로로 선을 하나 그리는 코드였는데, 그 때도 자판이 익숙하지 않던 나는 친구가 준비가 마치고 나올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입력을 마칠 수 있었다.

그것을 보던 친구는 책의 뒷 페이지를 보여주면 이렇게 하면 더 쉽게 그릴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HLINE 명령어를 사용해서 그리는 코드. 그 코드를 보면서 충격에 빠졌다. 복잡하고 길게 느껴졌던 FOR 문 코드가 이렇게 깔끔한 모습의 코드로 바뀔 수 있다니. 이 때 프로그래밍이란 것에서 예술성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일을 계기로 컴퓨터도 없이 베이직 책을 사들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베이직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머리 속으로 짠 코드를 그대로 공책에 옮겨적었다. 적은 코드는 시험을 보고 오후에 친구 집에 가서 입력을 했다. 친구는 아직도 이 때 나 때문에 게임을 못 했다고 핀잔을 주곤한다.

이렇게 개발자로서의 첫 발자국을 떼기 시작했다.

지금은 컴퓨터공학도 전공하고 개발자로 벌써 10년을 일하고 있다. 내 머리 속에는 간단한 로봇을 만들 수 있는 모든 지식이 이미 들어있다. 하지만 로봇을 만들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코드를 입력하고 실행 해볼 수 있는 컴퓨터가 5대나 있지만 업무를 빼고는 코드 한 줄 입력하는 일이 많지 않다.

그 때 당시의 열정과 즐거움은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일까 궁금해진다.